End of Year Retro 2025
현대자동차에 합류하기 전, 인사팀에서는 진급이 거의 확정적인 것처럼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와 보니 실상은 많이 달랐다. 나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작년 첫 고과에서 나는 1월 입사자라는 이유로 평가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때문에 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규칙이라면 따라야겠지만, 인사와 내부 사정이 다른 것에 실망스러웠다.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 역시 각자 나름의 불만을 안고 출발했던 것 같다. 바꿀 수 없는 것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다른 일들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다.
1분기는 목표가 사라진 채로 거의 의욕 없이 흘려보냈다. 그 전까지는 대학원 시험을 잘 치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는데, 결과 발표가 계속 미뤄지면서 마음이 더 힘들어졌다. 여러 번 연기되었던 결과는 4월 초에야 나왔고, 낙방이었다. 그 원인이 GPA인지, 시험 결과인지, SOP인지, 영어 성적인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궁금해 문의했지만 구체적인 답을 듣지는 못했다. 대신 아래와 같은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We regret to inform you that your application in this admission cycle was not successful. Please understand that admission into the Master of Science in Machine Learning is very competitive and takes into account a large number of criteria. Due to restrictions on the number of places, we unfortunately have to decline a large number of strong applications. Although this final decision may be disappointing, we are confident that, given your credentials, many other opportunities will open up for you.
"Strong applications"라는 표현에 그나마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같은 꿈을 꾸기에는 아이엘츠 성적 만료가 코앞이었고, 재도전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한정된 시간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예전부터 와이프가 추천해주던 유학원과 박람회가 떠올랐다.
코엑스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유학·해외취업·이민 박람회를 찾아보고, 별다른 기대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영국 석사는 1.5년 코스였지만, 아이엘츠의 영국 전용 버전이 신설되면서 기존 성적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 대안으로 호주가 눈에 들어왔다. 아랍에미리트의 다른 대학원도 가능성은 있었지만, 예전부터 시드니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하던 와이프의 영향으로 호주 대학원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박람회에서 연결된 유학원은 생각보다 체계적이지 않았고, 진행 과정도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으로 급변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정의와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물리 AI 시대가 오기 전에 관련 기업으로 이직하거나 연구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판단은 분명했다. 그렇게 인공지능 석사를 목표로 상담을 이어갔다. 아이엘츠 성적과, 자금, 경력, 그리고 의지도 있었기에 과정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무렵 퇴사 의사를 밝혔고, 멋진 동료들로부터 불확실한 앞길에 대해 따뜻한 덕담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 참 감사했다.
집을 팔고, 가진 것들을 정리한 뒤, 캐리어 두 개만 들고 7월 13일 호주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훨씬 쌀쌀했던 호주의 겨울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꽤 한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익숙했던 것은 정제된 영어였다는 걸 곧 깨달았다. 현지인들의 영어와 영어를 세컨드 랭기지로 사용하는 친구들의 영어는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한국어로도 아카데믹 레포트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영어 레퍼런스를 포함한 IMRD 포맷의 리포트를 작성하는 일은 정말 버거웠다. "이만큼 돈을 쓰는데 석사 학위쯤은 그냥 살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ChatGPT조차 없던 시절에 해외 석박을 마친 선배님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몇몇 뛰어난 20대 글로벌 인재들을 보며, 그들의 10년 뒤 모습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수업과 과제, 시험에 적응해 가는 시간 속에서, 와이프가 잠깐씩 지구 반대편으로 와줄 때마다 마음의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New South Wales 주에서의 혼인신고까지 마무리하며, 1학기를 High Distinction으로 잘 끝낼 수 있었다. 마지막 달에는 멋진 슈퍼바이저 밑에서 재미있는 연구를 같이할 기회도 얻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해보고 싶었던 코드 템플릿화와 프롬프트화 역시 그 마지막 달에 시도해볼 수 있었다.
내년에는 어떤 회고를 쓰게 될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